창덕궁에 불이 꺼지면(몰입, 간접경험, 준비)

이번 그림책은 그림책 연령별 권장도서(서울시교육청, 2025년 겨울방학, 유아)에서 소개해 드린 최정혜작님의 『창덕궁에 불이 꺼지면』입니다. 출판사 '책 읽는 곰'에서 시리즈로 내는 우리 문화 그림책 <온고지신>의 24번째 책입니다. 저는 제목을 보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창덕궁에 어둠이 내려앉고, 관광객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고 호기심을 느껴 읽어보게 된 책입니다. 과연 저희 아이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최정혜_창덕궁에 불이 꺼지면

호기심, 속도감 있는 몰입으로

작가가 창덕궁을 관람하고 나서 ‘불이 꺼지고 모든 관람객이 집으로 돌아가면, 과연 궁궐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금천교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작은 해치는 어떤 꿈을 꿀까?’라는 상상으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작가의 이런 상상으로 완성된 이 책은 해치를 따라 창덕궁의 낮과 밤을 아름다운 수채화로 보여주며 창덕궁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게 하고 창덕궁 곳곳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과연 저도, 저희 아이들도 '낮에만 보았던 궁궐의 밤의 모습을 어떨까?'라는 호기심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해치가 개구리 친구를 찾아 창덕궁 곳곳을 뛰어다니는 장면에 속도감 있게 책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아이들은 창덕궁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경복궁에 가 본 적이 있어서 "우리 경복궁에 각봤잖아, 거기에서도 해치 봤어"라며 나름 친근감을 가지고 책을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해치(獬豸)란 선악을 판단하고 불의를 물리치는 상상 속의 동물로, 전통적으로 궁궐 입구나 다리 옆에 세워두던 수호신상입니다. 실제로는 위엄있게 생겼지만 책에서는 강아지처럼 귀엽게 그려주어 아이들이 더 친근감있게 해치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었던 것은, 창덕궁에 가 본 적 없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경복궁 이야기를 꺼냈다는 점입니다. 영제교 위에서 봤던 해치, 해설사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서로 떠올리면서 "해치가 왜 거기 서 있는지 이제 생각났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겪었던 장면과 연결 지으면서 이해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수채화 그림이 만들어낸 간접경험의 힘

이 책은 특히가 그림이 아름다운 책이었습니다. 불이 꺼진 뒤 달빛이 은은하게 창덕궁 처마 위로 흘러내리는 장면, 단풍이 울긋불긋 물든 후원과 건축물이 어우러진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아이들과 감탄하며 보았습니다. 해치가 간략하게 알려준 창덕궁 곳곳의 건축물도 아이들과 그림 하나하나 눈여겨 보고 이야기하며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그림 속에서 '개구리 찾기' 놀이를 하다 보니 그림을 더 자세히 보며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직접 방문했을 때에는 보지 못했을 창덕궁을 위에서 내려다 본 조감이나 각 건축물의 숨겨진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재미있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책에서 호기심을 갖게 된 저희 아이들은 "창덕궁에 꼭 한번 가보자"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책에서 이렇게 창덕궁을 미리 접했으니, 나중에 실제로 방문하면 훨씬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창덕궁을 가기 전에 책에서 접해보는 것을 교육심리학에서는 간접경험(Vicarious Experience)이라고 부릅니다. 간접경험이란 직접 겪지 않아도 타인의 행동이나 이야기를 관찰하는 것만으로 학습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책 속 경험을 자신의 경험처럼 내면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의 사회학습이론(Social Learning Theory)에서 핵심 개념으로 다루는 내용인데, 그림책은 이 간접경험을 가장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매체 중 하나입니다. 창덕궁에 직접 방문할 때에는 보지 못했을 장면과 듣지 못했을 이야기들을 책을 통해 접하고 기억하며, 관심도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림책 한 권이 어떻게 실제 방문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을까요? 반두라의 이론에 따르면, 관찰 학습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주의(Attention), 기억(Retention), 재현(Reproduction), 동기(Motivation)의 네 단계가 갖춰져야 합니다. 이 그림책은 해치라는 캐릭터를 통해 아이의 주의를 끌고, 아름다운 수채화 삽화로 기억에 남길 만한 인상을 심어주고, "나도 가보고 싶다"는 동기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준비해야 할 것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데 아이가 "상량전은 뭐 하는 곳이야?"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책 뒷부분에 창덕궁 주요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정리되어 있는데, 다행히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 전에 제가 미리 한 번 읽어보아서 "경치도 보고 행사도 하는 곳이야."라고 대답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기 전에 부모가 먼저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보며 창덕궁에 대해 미리 알아두시기를 권합니다. 그럼 아이 질문에 훨씬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을 읽고 난 뒤 함께 해 볼 수 있는 활동도 몇 가지 추천드립니다.

  1. 다른 궁궐 버전 상상하기: "경복궁에 불이 꺼지면 어떨까?", "수원화성에 불이 꺼지면?"처럼 아이와 함께 다른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봅니다. 아이가 직접 이야기 구조를 만들면서 창의적 사고와 역사 감각이 동시에 자랍니다.
  2. 문화유산 지도 그리기: 아이가 아는 궁궐이나 문화재를 종이 지도에 표시해 봅니다. 창덕궁, 경복궁, 덕수궁처럼 서울 안에 있는 궁궐만 연결해 봐도 아이 눈에 역사가 지리와 연결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3. 책 읽고 나서 궁궐 방문하기: 책을 먼저 읽고 실제로 창덕궁을 방문하면 아이의 반응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미리 간접경험을 통해 공간을 상상해두었기 때문에, 실제로 발을 디디는 순간 훨씬 강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창덕궁 후원은 해설사와 함께하는 관람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창덕궁 해설 안내: 궁능유적본부 - 관람안내>해설안내>창덕궁)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은 역사 지식을 채우는 목적보다 정서적 친밀감을 형성하는 목적으로 읽을 때 훨씬 효과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문화유산 교육(Cultural Heritage Education)이란 단순히 유적지의 이름과 연도를 암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먼저 심어주는 과정입니다. 그 감정이 쌓여야 나중에 역사 공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그 첫 단계를 아주 부드럽게 해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온고지신>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추천드립니다.

『창덕궁에 불이 꺼지면』은 5~8세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유산을 처음 소개하는 입문서로 손색이 없습니다. 역사 지식을 억지로 넣으려 하지 않고, 상상과 감정을 먼저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아이가 "창덕궁 가보고 싶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정서적 친밀감을 형성한다는 목적은 달성한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했던 우리 문화 유적에 대해, 이 책 한 권으로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건 어떨까요.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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